지상관측소 conspicil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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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리나의 남편에겐 기일이 없었다. 어느날 돌연 사라졌을 뿐 사망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다만 기일로 통용되는 날은 분명 있었고, 그건 무에나 니어가 이리나의 남편을 실종 처리한 날과는 달랐다. 그가 실종된 날이란 기실 무에나 혼자 이리나의 남편을 우연히 만난 다음날이자 그가 광석병 발작으로 인해 사망한 날이었다. 이리나의 남편이 살아생전 스스로 이리나 가족과 니어 가문을 떠난 날과는 달랐다.그 다른 날, 이리나는 어린 아가씨들과 자신의 자식을 모두 돌본 뒤 아이들이 잠든 뒤에 홀로 사용인의 식당 겸 조리실에서 술병을 하나 따 마시고는 했다. 병의 라벨은 안에 든 술이 그다지 비싸지 않음을 시사했으며, 하루 일과를 마친 노동자들이 술 한 잔을 가볍게 걸치는 일은 귀족과 시종을 막론하고 흔한 일이었으므로 무..
학교는 지루하고, 따분하고, 쓸모없다. —1학년 A반 아키야마, 맞지? —소문대로 진짜 예쁘다. —아니, 소문이 약한 거 아니야? 매일같이 질리지도 않고 똑같은 일의 반복일 뿐이다. —선배, 2학년 A반이라고 했죠? … 미즈키는 무겁게 내리눌리는 눈꺼풀을 몇 번씩 깜빡거렸다. 커튼을 치지 않았는데도 방 안은 어두웠고, 벽 너머로도 집안의 고요함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옆으로 돌아 누운 미즈키는 스마트폰의 화면을 켰다. 3시 34분. 그럼 그렇지, 속 편하게 잠 잘 수 있을 리 만무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두 시간도 채 잠들지 않았다. 이래서야 오늘 작업은 스킵한다고 한 의미가 없어지잖아, 성가심이 엉킨 심통이 가장 먼저 머릿속으로 튀어나왔지만 다시 PC를 킬 마음은 들지 않았다. 유키의 일로 모두가 예민한..
마법부 문을 열고 나오며 루치아는 숨을 뱉었다. 따뜻했던 실내를 순식간에 거짓으로 만드는 차가운 공기가 두 뺨에 와 닿은 탓이었다. 급격한 온도 차를 무마하고자 폐로부터 한 번 더 숨을 끌어모았지만 크게 유의미하진 않았다. 이대로 얼마간 거리를 더 걸을 예정이었으니 냉랭한 기온에 익숙해질 대비를 하는 게 더 나을 듯싶어 그는 코트 옷깃을 당기며 걸음을 옮겼다. 내쉬는 숨이 하얗게 뭉쳐 입김이 되어 허공에 오래간 머무르는 계절이었다. 마법사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의미가 없었지만, 연말이 다가온다는 건 머글에게나 마법사에게나 똑같았다. 인구가 더 많은 머글 세계의 기념일 날짜에 맞춰 사람들은 12월이 되면 한 해의 마무리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가족 혹은 친구들과 어떤 식으로 연말을 보낼지 구상하고 다녔다. 자연..
함선은 황야를 향하고 있었고, 갑판은 그 황야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전부 끌어안고 있었다. 갑판에 선 리베리 하나는 그 황야를 전부 감당하기에는 모자라 보였다. 리베리의 탓은 아니었다. 세상을 떠안을 수 있는 개인이 있다면 켈시는 카르멘과 대지에 관한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일개 오퍼레이터인 리베리는 그들이 우물가에서 나눈 대화를 알지 못했지만, 스스로 이미 그러한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는 듯했다. 실제로 그의 눈에는 황야가 낯설지 않았다. 엘리시움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지면과 수평선을 이미 등진 적이 있었다. 한 인간이 세상의 무게에 짓눌리는 일로부터 밀려나고 회피하기를 택한 이상, 다시금 비슷한 광경에 압도되기란 어려울 터였다. 감당할 수도 없는 세상의 무게보다 온 몸의 혈관을 타고 도..
미즈키는 미지근하게 식은 머그잔을 들었다. 가득 있었던 코코아는 어느덧 절반이 줄어 있었고, 처음 코코아를 입에 댔을 때부터 시간은 4시간 반이 지나 있었다. 한밤중이었다. 늦게까지 활동하는 사람들조차 대부분 잠에 드는 이런 시간이면 창 밖으로부터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SNS나 포털 사이트의 갱신도 한없이 느렸다. 빛도 소리도 다가오는 것이라고는 모니터로부터 나오는 푸르스름한 전자 기계 안의 것이 전부인 시간. 이럴 때면 미즈키는 어항을 바라보는 마후유의 마음이 무엇일지 알 것 같곤 했다. 자신이 어항을 바라보는 쪽이 아니라 어항 안에 있는 쪽이라는 차이점이 있었지만, 문제될 건 없었다. 그런 감각이라면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익숙하지 않던가. 디지털의 물결이 파도가 되고 달빛이 되어 스며들었다 빠..
체르니의 방에는 오로지 적막 뿐이었다. 오선지 위에 악상을 그려내느라 사각거리는 만년필 소리와 악곡이 올바르게 새겨졌는지 가늠하기 위해 울리는 피아노 소리를 제외하고는. 체르니에게 그것들은 응당 존재해야 하는 소리였으니 적막의 범주에 끼지도 않았다. 심지어 오늘은 그에게 성화를 부릴 메딕 오퍼레이터들도 없었다. 이번 작곡을 위해 향후 2주간 방 안에 틀어박혀 어떤 생활패턴으로 하루하루를 보낼지에 대한 내용을 3주 전부터 의료부에 소상히 보고한 탓이었다. 그의 보고서 겸 요청서를 본 메딕들은 여기가 개인 병실인 줄 아냐며 불같이 화를 냈지만, 작곡이 끝나는대로 반 년은 의료부의 지시를 철저하게 따르는 등의 조건 하에 대화는 순조롭게 마무리 되었으며, 일부 메딕들은 그가 이렇게라도 협조적으로 나오는 게 어디..
신의 반석 위에서 그가 제어하는 소세계(小世界)의 움직임과 변화를 관측하던 영웅은, 시계가 예정된 시각을 표시하자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려 연구실에서 빠져나갔다. 베헤모스의 몸과 마음은 의심의 여지 없이 세계를 위해 존재했으나, 완벽하게 조형된 신의 대리인이라 한들 신의 다른 여느 창조물과 같이 그또한 세계의 법칙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모든 창조물에 마땅한 쓰임새가 있듯 모든 창조물은 적절한 유지와 보수가 필요한 법. 진정 세계를 위하고자 한다면 기본적인 규율에서 빗겨가는 일이 일어나선 안 되었으므로 그의 휴식 시간은 항시 일정했다. 그 어떤 일을 하든 예외는 없었다. 물론 간혹 베헤모스의 사고와 관념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들은 그의 존재감을 인식하는 만큼 그의 부재나, 그가 시선을 주지 않는 일을 두려워..
“컨트롤, 네가 어떻게 좀 해봐!” 들릴 리 없는 이름이 들려왔고, 외침이 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일렉트로는 그 이름이 잘못 들려온 이름이 맞다는 걸 깨달았다. 잘못 붙여진, 혹은 누구에게도 붙여져선 안 되는 이름의 주인은 브린디쉬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방류되는 폐수를 닮은 피부색을 가지고 있었다. 거무튀튀한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뻗치고 꼬여 있었고, 제대로 된 빗질 한 번 가져보지 않은 짐승의 털마냥 부산스러웠다. 낙엽처럼 바싹 마른 입술과 어두운 공동처럼 퀭한 눈은 누가 보더라도 제대로 된 끼니를 챙기지 못한다 생각할 게 분명했고, 입고 있는 옷가지 또한 추레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막 병실의 침대에서 일어나 나온 것만 같은, 넓고 후줄근한 천 쪼가리. 하지만 그가 눕고 자온 곳이 병실 침대가 ..
아하스는 무성하게 자라난 고무나무 잎과, 생장의 제한을 잊은 양 뻗어나가는 두꺼운 넝쿨을 응시했다. 흠 없이 단단한 녹색은 살랑거리는 바람에 따라 가볍게 움직였고, 그 아래로 작은 덩치의 창조생물 군체 하나가 줄을 서 움직였다. 번개의 에테르와 얼음의 에테르, 물의 에테르가 극단적으로 부족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식물을 포함한 생명들은 부족한 에테르를 효율적으로 저장하기 위한 내부 기관을 형성하곤, 특정 에테르를 통해 다른 에테르를 변환하는 활동을 호흡처럼 수행했다. 이 이데아 환경 조성은 성공적이었다. 정글을 이룬 생태 군락은 이보다 열악한 환경에 놓여져도 살 수 있을 터였다. 엘피스의 연구원들이 보면 칭찬하다 못해 환호를 보낼 터였다. 그러나 아하스는 묵묵히 손을 휘저어 거대 열대 우림을 모두 지워냈..
죽음은 생명 가진 것들이 응당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생사의 경계는 언제나 확고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단 하루, 망자의 날을 제하고. 경계가 그어져 있으면 그 경계 너머와, 너머에 있는 존재를 그리워도 하는 법. 일 년 중 오로지 한 날에 한해 산 자들은 죽은 자들이 생으로 가득찬 세계에 침범하도록 용인했고, 그 덕에 망자들은 경계를 타고 넘어 밀물처럼 허락되지 않은 세계를 유람했다. 그리운 누군가를 위해, 혹은 죽어서도 잊을 수 없는 원한을 위해, 혹은 그저 찰나의 유희를 위해. 그러나 모든 예외에는 그만큼의 안전장치가 존재해야 하는 법.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 그리고 죽은 사람을 위해 경계간의 통행이 허락되는 이 날, 살아 있는 이들은 죽은 이와 분간하기 어렵게끔 망자와 비슷한 분장을 해야 ..
안녕, 현자님. 원래 세계로 돌아가게 된 걸 축하해. 이 말을 가장 먼저 해야겠지. 현자님은 가족을 많이 그리워했으니까. 꿈결 속의 바다로 돌아가는 셈이 된 현자님이 부럽다고 생각하기도 해. 그렇지만 현자님이 이곳의 차가운 바다가 아닌 사랑하는 이들의 온기로 가득한 현자님의 원래 세계의 바다로 가게 된 걸 진심으로 기쁘게 여기고 있음을 알아주길 바라. 그게 내 본심에 더 가깝다는 것도. 본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현자님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결정한 이유기도 하니까. 현자님도 알고 있겠지만, 인터뷰 때는 이래저래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지. 미안하게 생각해. 추궁하지 않아 주어서 고맙다는 말도 전하고 싶어. 싫었던 건 아니야. 그랬다면 아마 거절했을 테니까. 인터뷰의 취지에는 지금도 동의하고 있어. 나에 ..
흰 분필로 그렸던 마법진의 일부를 손으로 쓸어내 지운 유유코는 분필을 쥔 손을 다시 움직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두 발짝 떨어져 선과 선의 이음새를 바라보다, 도로 자리에 앉아 다시 그것을 지웠다. 그런 행동이 몇 번씩, 거의 십여 번에 가깝게 반복됐다. 유유코가 원하는 형태의 곡선과 교차점이 만들어질 때까지 쉴 새 없이.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조그만 손에서 4분의 1정도가 닳아 없어진 분필이 작은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녀의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세 발짝을 떨어져 바라본 마법진은 한 시간 전에 비해 진척된 부분은 한 뼘밖에 되지 않았지만, 다음으로 넘어가도 미련 남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유유코는 몹시 뿌듯했다. 그가 그리려는 진은 이 거대한 건..
어느 날, 외면받고 소외되어 무리에 섞이지 못한 한 고독한 인어에게 인어공주가 찾아왔습니다. 비슷한 처지였던 인어공주는 그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인어공주가 더 많은 친구들을 만나면서 육지로 모험하는 꿈을 꾸게 되자 그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마녀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존재가 되면, 언젠간 공주와 함께 같은 세상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 … …. “고토 씨, 대본은 어때?” 스태프가 말을 걸자 나기야는 흠칫하고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 네. 좋은 것 같아요. 캐릭터는 색다른데, 기존 동화와 다른 점은 결국 없어서 이해하기 편할 것 같습니다.” “고토 씨도 그렇게 느꼈다니 다행이네. 피닉스 원더랜드의 홍보 공연으로 테마가 화젯거리가 되어서 진행하기로 결정했지만, 기존 극들과의 차별점을 어..
피크타임의 마지막 손님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가게 문이 흔들거리다 곧 완전히 닫혔다. 그랬구나, 라는 걸 메루가 알아차리는 건 그로부터 몇십 분이 더 흐른 뒤였다. 설거지 할 시간도 없이 테이블을 치우고, 사이사이 들어온 테이크아웃 주문을 맞추는 데에도 정신이 없던 탓이었다. “멜쨩!” 함께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을 한 사키가 특유의 경쾌한 목소리로 그를 두 번이나 부른 뒤에야 메루는 더이상 손님이 없는 홀을 볼 수 있었다. 얼굴에서 물음표를 바로 지우지 못한 메루를 보며 사키는 밝은 표정으로 키득키득 웃었다. 친구의 그 표정이 단순히 아르바이트가 너무 바빴기 때문이 아니라, 미래에 직업 삼고 싶은 일이기에 최선을 다하느라 나온 거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피크타임 ..
그 루나리는 몹시 기이했다. 아펠리오스는 자신이 루나리를 발견한 게 맞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가 이제껏 죽여 온 수많은 이방인들과 꼭 닮아 있던 탓이었다. 그래서 그는 순간적으로 심장이 철렁했고, 달빛만이 인도하는 어둑한 산길 속에서 발걸음을 포함한 자신의 모든 움직임을 멈춘 채 우뚝 섰다. 무엇보다 이 느낌이 그옛날 ‘그 이방인’을 죽였을 때 느꼈던 감정과 무척 닮아 있기 때문이 컸다. 그 때 아펠리오스는 단순히 죄책감이 유독 크게 들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밖에 다른 이유가 존재할 까닭도, 원인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어쩌면 그게 전부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하여 아펠리오스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자신과 연결된 하나뿐인 그의 쌍둥이 누이를 생각했다. 누이, 너도 느끼고 ..
세상은 까맣습니다. 셀 수 없는 별들이 흩어진 낱알처럼, 누군가 실수로 엎지른 설탕처럼, 햇빛 아래 반짝이는 모래처럼 머물러 있는데도 그렇습니다. 해라 부를 만한 별이 떠오르고, 달이라 부를 만한 별이 모습을 드러내는 걸 응시하면서도 저는 그 너머 검은 공간에 시선을 두며 밤과 어둠만을 봅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 자신’이라 칭할 만한 모든 것, 저의 팔다리와 저라는 개체의 존재감이 그 속에 섞여드는 것을 느낍니다. 존재가 희미해지는 느낌은 떫은 맛이 납니다. 씁쓸하고, 초라합니다. 그런데도 뱉어내기 보다는 이대로 인내하고 싶다는 마음이 큽니다. 아마 그것이 모든 개체와 존재의 처음 형태이기 때문일 겁니다. 당신은 누구보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겠지요, 당신의 미메시스가 그걸 증명하니까요. 늘 당신에게 배..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빛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S.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 거라 생각합니까. 나는 결코 그 양이 많지 않으리라 확신합니다. 우리의 생과 우리의 존재가 증명하는 명제이니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리석은 질문이 떠오른 나를 당신은 이해할 거라 믿습니다. 내 꿈과 지옥에 항시 거주하는 당신이라면 그 청년을 보지 않았습니까. 나의 그림자 속에 한 움큼 손을 집어넣어 나를 헤집고, 낯선 색채와 빛깔로 이뤄진 세상을 집어넣은 그 자를. 당신이 보았듯, 그와 만난 이래로 내 삶은 줄곧 혼돈이었습니다. 괴로움이 소용돌이치는가 하면 생전 접해보지 못했던 쾌락이 용솟음쳤습니다. 스스로 내뱉는 호흡이 이질적이었으며, 들이마셔 삼키는 타인의 호흡은 또 얼마나 기괴했던지. 그와 함..
크로나는 어디도 외출하려 하지 않았다. 마카가 인적이 드문 밤에 단 둘이 하는 산책을 제안해도 마찬가지였다. 크로나가 본래 어딘가를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성정이 아니었으므로 그것 자체는 걱정할 게 되지 않았다. 마카가 걱정한 건, 크로나가 두 발로 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자신의 상태를 불안정하다고 느끼는 점이었다. 그또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최후의 월면 전쟁이 있기 전까지, 새까만 달 안에서 크로나는 철저하게 혼자였고 그 안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었을지 마카가 알 방법이 없었으니까. 마카가 시무룩해지는 지점도, 마음에 들어할 수 없는 것도, 미안해지는 지점도 전부 그거였다. 크로나를 너무 오래 혼자 뒀다. 달에 닿기 위한 준비가 생각보다 더 오래 걸렸다. 모두가 최선을 다..
빙글빙글 도는 관람차, 내가 사랑하는 세계를 높이서 우뚝 장식해 왔던 놀이공원의 아이덴티티. 어릴 적엔 그 관람차 안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너무 커서, 이곳을 한없이 돌아다녀도 시간 가는 줄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어른이 되고도 둘러볼 곳은 아득히 많을 거고, 관람차 또한 몇 번이고 타도 별하늘처럼 끝 없을 거라고. 그래서 그 관람차를 애써 무시해 왔다. 정말로 소중한 세계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고, 믿을 수 없고, 믿고 싶지 않아서 늘상 등 뒤에 둔 채로 스테이지에만 매달리면서. 그러니까, 그 날의 기억은 처음에는 두려움으로 시작했다는 이야기. 츠카사 군이 어디까지 눈치챘을지 생각하는 일조차 두려워서, 눈을 질끈 감고 관람차에 올랐던 기억이 생생했다. 지금의 관람차는 그때 같지도 않고,..
찰칵거리는 소리를 내곤 곧바로 타이핑하는 데 여념이 없는 갈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미가 아이나에게 어떤 말을 수근거렸다. 그러자 아이나도 끄덕였고, 둘의 수근거림을 들은 루치아가 동의의 뜻을 내비치자 배리스도 그제야 그들의 대화에 꼈다. 버닝 레스큐 전원이 아예 갈로를 빤히 응시하는 동안, 갈로 티모스는 자신한테 오는 시선일랑 꿈에도 생각 못 한 채로 핸드폰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파란 머리카락 아래로 늘 씩 웃던 표정이 텀을 두고 시시각각 움직였다. 한 번은 그가 으레 짓는 표정처럼 훗 하는 미소가 지나갔고, 그 다음엔 양 눈썹을 가운데로 모으고 골똘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고 나선 히죽거리는 요상한 웃음을 연신 짓더니, 곧 다시 진지하게 무언가에 열중했다. 갈로가 그러기 시작한 건 하루이틀 사이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