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관측소 conspicilium

마법부 문을 열고 나오며 루치아는 숨을 뱉었다. 따뜻했던 실내를 순식간에 거짓으로 만드는 차가운 공기가 두 뺨에 와 닿은 탓이었다. 급격한 온도 차를 무마하고자 폐로부터 한 번 더 숨을 끌어모았지만 크게 유의미하진 않았다. 이대로 얼마간 거리를 더 걸을 예정이었으니 냉랭한 기온에 익숙해질 대비를 하는 게 더 나을 듯싶어 그는 코트 옷깃을 당기며 걸음을 옮겼다.

 

내쉬는 숨이 하얗게 뭉쳐 입김이 되어 허공에 오래간 머무르는 계절이었다. 마법사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의미가 없었지만, 연말이 다가온다는 건 머글에게나 마법사에게나 똑같았다. 인구가 더 많은 머글 세계의 기념일 날짜에 맞춰 사람들은 12월이 되면 한 해의 마무리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가족 혹은 친구들과 어떤 식으로 연말을 보낼지 구상하고 다녔다. 자연히 처리할 것도, 민원 사항도 많아지는 마법부는 한 해에서 두 번째로 바쁜 시기를 맞이했다. 여느 머글 공무원과 매한가지 신세인 셈이었다.

그 와중에 5년을 내다보고 준비한 프로젝트가 예상보다 이른 시기에 끝을 보였다. 루치아가 무언가를 못 해서가 아니었다. 담당 고위 인사를 잘못 만난 건 더더욱 아니었다. 프로젝트는 순탄하게 끝났다. 관계자들은 놀라운 행정력과 현장 수행력을 보였고, 프로젝트의 수혜를 받은 마법사들로부터 좋은 피드백을 받았다. 마무리 단계를 마치면 프로젝트가 보인 성과는 마법부의 귀중한 자산이 되어 앞으로의 마법사 세계를 바꾸는 데 일조할 터였다.

불사조 기사단과 죽음을 먹는 자들 간의 전쟁 종식 이후 직접적으로 대립에 나서거나 지팡이를 겨누지 않았어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이 참가한 전쟁이 애초 그런 거였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차오른 물이 둑에서 넘쳐 마을을 휩쓸어버리는 일. 루치아는 파고 속에 있었던 자였기에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삶이 망가진 이들이 있다는 걸 알았고, 자신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숭고한 의지 때문은 아니었다. 그가 어디 그런 식으로 마음을 쓸 줄 아는 이였던가? 루치아는 타인의 신변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는 사람이었고, 참작의 여지가 있든 없든 간에 타인이 해를 입고 고통스러워하는 일을 스스로의 의지로 추구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앞으로도 그럴지도 몰랐다. 이건 위협받을 바에는 위협하는 사람이 되는 걸 거리끼지 않는 일종의 천성이었으니까.

전쟁 구제 사안과 마법사 복지 프로그램에 뛰어든 이유였다. 루크레치아 아렌 피아레체가 그런 사람이었으므로 그를 둘러싼 세상이 온정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일에 힘을 보태야만 했다. 언젠가 그가 이기적인 일을 반복했을 때 남 앞에서 조금이라도 떳떳해질 수 있기 위해. 자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준 사람들에게 나도 그간 세상을 위해 한 게 이만큼 있었다며 무언가를 들이밀 수 있기 위해. 그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더는 타인에게 사고도 행동도 휩쓸리지 않고 그답게 살아가고 싶어져서.

 

그러니만큼 혼신을 기울여 제의하고 승낙받은 프로젝트가 준수한 성과를 거두며 조기에 마친다고 하면 가슴이 부풀어오를 듯 벅차야 했는데, 루치아는 영 씁쓸한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포트키를 쓰지 않고 부러 마법부에서부터 근처 시가지를 돌며 집까지 빙 돌아가는 이유였다. 가능한 한 집에 도착하는 시간을 늦추고 싶었다. 그런다고 프로젝트의 종료가 늦춰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하물며 저보다 일찍 퇴근해 집에 있는 짐을 슬슬 정리하고 있을 사람이 그가 늦게 온다 해서 결정을 미룰 건 더더욱 아닌데도.

 

요하네스가 프로젝트에 군말 없이 협력하기로 한 이래로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는 더는 자의로 무엇을 할 생각이 없었지만, 맡은 일에는 원체 성실했으므로 프로젝트가 조기에 종료되는 데에는 그의 노력이 크게 기여했다. 원활한 프로젝트 수행을 위한다는 얄팍한 동거가 이르게 끝을 맞이하게 된 건 덤이었다. 루치아는 무심코 한숨을 쉬었고, 자기 입가에서 새하얀 숨이 퍼져나오자 그제야 화들짝 놀랐다. 어떻게 해도 붙잡을 명분이 없다는 건 요하네스에게 동거를 제의한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불가능한 일에 매달려서는 안 됐다. 그래봐야 추해지는 건 자신이었다. 그가 쳐지는 가장 큰 이유도 공교롭게도 그 점이었지만.

고개를 들어 거리를 향해 시선을 돌리면 많은 사람이 누군가와 함께하고 있었다. 혼자인 사람은 적었는데, 그마저도 두 손에 뭔가를 들고 있거나 뭔가를 공중에 띄우고 있었다. 집에 돌아가면 선물을 받을 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니면 누군가에게 부칠 선물을 미리미리 준비하는 거던가. 루치아도 물론 연말 선물을 준비해야 했다. 그가 신세를 졌거나 신세를 질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많았다. 그가 가장 선물을 가까이에서 주고받고 싶은 사람은 그런 일에 전혀 흥미가 없을 뿐이었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 발걸음을 늦추려던 거였는데, 집에 가고 싶은 마음만 괜스레 커지는 광경에 루치아는 조금 우울한 기분으로 가까운 제과점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어쨌든 요하네스가 집에 있으니 퇴근길에 뭔가를 사 들고 가야 했다. 식삿거리뿐 아니라 디저트도 들고 가고 싶었다. 이제 곧 작별이지 않나. 저녁 식사 이후 후식 타임이라도 늘려야 했다.

 

그러나 루치아는 제과점 앞에서 어? 하는 멍청한 소리와 함께 우뚝 멈춰섰다. 제과점 문에서, 요하네스가 나왔기 때문이다. 손에는 가게 로고가 인쇄된 봉투를 든 채였고, 루치아를 본 요하네스도 의아한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퇴근한 거 아니었냐?”

“했지, 퇴근……. 가는 길에 뭐라도 좀 살까 하고. 너는? 너야말로 나보다 일찍 퇴근하지 않았어?”

“……먼저 끝났으니까 내 쪽에서 사는 게 맞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아, 뭐.”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루치아는 순간적으로 이런저런 상상이나 해버린 자신을 속으로만 질책하며 요하네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 네가 샀으니 들고가는 건 내가 할게.”

“……그렇게 해.”

 

요하네스는 순순히 갈색 봉투를 내밀었고, 제과점 봉투를 받아 든 루치아는 코끝에 확 와닿는 달달한 냄새에 자신의 표정이 조금 풀어지는 걸 느꼈다. 자신과 의도한 바는 전혀 다르더라도 어쨌든 똑같이 후식을 생각했다는 게 솔직하게 기뻤다. 아직은 함께 사는 사이인 것이다. 루치아는 지금은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둘은 함께 걸으며 그들이 그간 매진해 온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앞으로의 지원 범위가 어떻게 될 것 같냐던가, 전쟁 이후 변한 점들이 프로젝트로 인해 다시금 어떻게 변하고 있다고 느껴졌다던가, 장차 이 프로젝트를 인계받아 재설계할 마법부 인사는 누가 될 것 같냐던가 등등. 그러는 동안 아무도 서로에게 왜 포트키를 타지 않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저 걸었다. 루치아는 손에 디저트 봉투를 들고, 요하네스는 양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은 채로. 보폭은 달랐지만 향하는 방향은 같았다.

홀로 거리를 걸었던 게 불과 몇십 분 전이었음에도 연말의 거리를 걷는 두 사람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루치아가 인식하기도 전에, 하늘에서부터 천천히 눈송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루치아가 봉투를 들고 있지 않은 손을 하늘을 향해 내밀었다.

 

“연말엔 역시 눈이구나.”

“…….”

“있지, 올해도 되게 순식간에 지났지?”

“모르겠는데.”

“물론 요하네스 너야 그렇겠지. 예년이랑 다를 바 없이 일에 충실하셨으니까.”

“맡은 일에 태만한 얼뜨기들이 아직도 봉급을 받고 있다는 점은 괄목스러웠지.”

“인력이 부족하니까. 그만한 인원수라도 남아 있는 게 어디야.”

 

또 일 얘기로 흘러가 버렸네. 루치아는 자신이 아마추어 같다고 느꼈다. 그렇지만 묻고 싶은 거라던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꺼내려 해도 답지 않게 쉬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조금만 사적인 얘기로 흘러가면 방을 뺄 날짜를 잡았다는 소식을 들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들어야 할 말이란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냥 그게 지금은 아닌 게 좋았다.

그런 심정일랑은 전혀 모르겠지, 하는 마음에 요하네스를 흘금 쳐다본 루치아는 눈꺼풀을 여러 번 깜빡였다. 요하네스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왜 봐?”

 

여느 때 같은 시큰둥하고 밉살스러운 대꾸가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요하네스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루치아는 그래서 도리어 의아함을 느꼈고, 무어라 말하려 입을 열 때쯤 요하네스가 말했다.

 

“넌 계속 그 집에서 살 거냐?”

 

죄지은 것도 없는데 철렁함을 느껴야 한다니, 루치아는 사랑이 참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표정에 그런 기색이 묻어나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그럼, 거기가 내 집인데. 객식구 신세에서 드디어 벗어난단 생각을 하니 기분 좋아진 거야?”

“프로젝트가 끝났으니 굳이 마법부 가까이서 살 필요가 없는 건 너도 매한가지 아니야? 이 일이 끝나면 휴가라도 떠나겠다고 노래 불렀던 것 같은데.”

“내 노래가 좀 옥 같긴 했지? 네가 내 음률을 맘에 들어 했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 괜찮아, 요하네스.”

“하…….”

 

루치아는 짓궂게 웃었고, 요하네스는 늘 짓던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루치아는 무심코 요하네스의 팔을 바라봤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쯤에서 와락 달라붙었을 텐데, 그의 동거인은 자신과 달리 타인과의 접촉을 끔찍이 싫어했다. 곧잘 다다르곤 했던 막힌 길이 이제는 익숙해 루치아는 미소나 지었다.

 

“그래도 나가기 전 기념 파티 정도는 해야 한다? 벌써 끝내주는 케이크 예약했으니까.”

“글쎄. 너 하는 거 봐서.”

“알아, 알아. 연말 공연 티켓도 이보니아한테 그냥 줘야겠…… 어?”

 

당연하게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일갈하리라 생각해 재잘거리던 루치아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리고 자기가 들은 말이 맞는지 의심하며 요하네스를 쳐다봤다. 그의 시선은 거리를 향하고 있어서, 12월의 추위에 영향을 받은 뺨만이 눈에 들어왔다.

 

“기념이긴 하잖아.”

 

무엇이? 루치아는 묻고 싶었지만, 요하네스는 어떤 것도 부연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걸으려다 루치아가 거의 움직이지 않는 속도로 발을 옮기자 루치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거기 계속 서 있기라도 할 셈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그가 천천히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그리고 작은 소리와 함께 세상에서 제일 낯선 감각이 루치아의 어깨를 스치고 멀어졌다.

 

“눈 쌓인다. 빨리 가지?”

 

그 말을 끝으로 요하네스는 정말로 돌렸고, 문득 루치아는 거리의 가게 한 곳에서 어떤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Tale as old as time

True as it can be

Barely even friends

Then somebody bends

Unexpectedly

 

머글 세계에서는 그런 일이 잦다고 했다. 연말이 되면 너도나도 거리를 걷는 두 사람을 가게로 손짓하기 위해, 그들이 귀 기울여 들을 만한 노래를 틀어 호객하는 것이다.

좋은 일이 있을 시즌이면 음악이 울려 퍼지게 하고 싶은 심리야 마법사들도 똑같은 사람이니 다르지는 않았지만, 이 근방은 마법부 건물이 근처에 있는 곳이라 머글들의 요란한 홍보 방식을 촌스럽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하물며 이 노래도 머글 동화에 곁들여지는 곡 아니던가. 이 노래를 선곡한 사람은 필시 주변 상인들로부터 평판이 낮을 터였다. 하지만 루치아는 예술에는 경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밑에서 자랐고, 그들을 좋아하긴 힘들었지만 예술에 관해서는 생각이 같았다.

 

Just a little change

Small to say the least

 

그런 그에게, 하필이면 이런 타이밍에 들려오는 게 이런 곡이라니. 루치아는 잠시 자신이 무언가 대단히 큰 착각을 하고 있다고 강하게 생각했다.

냉정을 되찾는 건 쉬운 일이었고, 루치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시 나란해진 요하네스에게 디저트가 추위에 다 식어버리면 어떡하냐는 실없는 소리를 하려다 도로 멈추고 말았다.

 

Both a little scared

Neither one prepared

 

노래가 흘러나오는 가게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요하네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