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관측소 conspicil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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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l 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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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를 해석하기에 앞서 관계를 이루는 인물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기에, 빈센트에 관한 이야기부터 하고자 합니다. 주신 자료들을 보자마자 빈센트의 인생이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빈센트는 배경설정만 보면 슬리데린이려나? 싶은데, 실제로는 후플푸프죠. 이는 승리를 손에 넣고야 말 정도로 노력하는 것도, 패배에서 쓴맛을 느낄 정도라 이를 싫어하는 것도 가문의 후계자라는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 내야만 한다는 강박과 의무감에서 기인할 뿐 빈센트의 본질과는 동떨어져 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의무와 짐을 떼고 보면 빈센트는 꽤 자상하고 아량 넓은 사람이지 않을까 해요. 여느 후플푸프가 그렇듯이요. 불가피한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슬리데린이 아니라 후플푸프라는 것도 이 추..
R은 밀레시안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이 가장 확고한 인물로 보입니다. 그런데 밀레시안이라는 건 사람의 그룹을 뜻하는 말이잖아요? 식물의 군집이나 동물의 종과 달리 사람은 저마다 개별개체이기 때문에 특정 그룹이 특정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반드시 장담하긴 어렵고요. 다난의 세계를 살아가는 밀레시안이라면 더더욱 이러한 개별성, 특징성이 도드라지지요.그러니 R이 ‘R’이라는 한 명의 사람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보유한 게 아니라 ‘밀레시안’이라는 점이 더 부각된다는 건 달리 말해 이렇게 표현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여기 있는 R은 물론 R이지만, R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R이라고 불리는 밀레시안이 있을 뿐.’따라서 R을 이야기하려면 우선적으로 다른 인물들을 경유해 가며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다..
이리나의 남편에겐 기일이 없었다. 어느날 돌연 사라졌을 뿐 사망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다만 기일로 통용되는 날은 분명 있었고, 그건 무에나 니어가 이리나의 남편을 실종 처리한 날과는 달랐다. 그가 실종된 날이란 기실 무에나 혼자 이리나의 남편을 우연히 만난 다음날이자 그가 광석병 발작으로 인해 사망한 날이었다. 이리나의 남편이 살아생전 스스로 이리나 가족과 니어 가문을 떠난 날과는 달랐다.그 다른 날, 이리나는 어린 아가씨들과 자신의 자식을 모두 돌본 뒤 아이들이 잠든 뒤에 홀로 사용인의 식당 겸 조리실에서 술병을 하나 따 마시고는 했다. 병의 라벨은 안에 든 술이 그다지 비싸지 않음을 시사했으며, 하루 일과를 마친 노동자들이 술 한 잔을 가볍게 걸치는 일은 귀족과 시종을 막론하고 흔한 일이었으므로 무..
학교는 지루하고, 따분하고, 쓸모없다. —1학년 A반 아키야마, 맞지? —소문대로 진짜 예쁘다. —아니, 소문이 약한 거 아니야? 매일같이 질리지도 않고 똑같은 일의 반복일 뿐이다. —선배, 2학년 A반이라고 했죠? … 미즈키는 무겁게 내리눌리는 눈꺼풀을 몇 번씩 깜빡거렸다. 커튼을 치지 않았는데도 방 안은 어두웠고, 벽 너머로도 집안의 고요함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옆으로 돌아 누운 미즈키는 스마트폰의 화면을 켰다. 3시 34분. 그럼 그렇지, 속 편하게 잠 잘 수 있을 리 만무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두 시간도 채 잠들지 않았다. 이래서야 오늘 작업은 스킵한다고 한 의미가 없어지잖아, 성가심이 엉킨 심통이 가장 먼저 머릿속으로 튀어나왔지만 다시 PC를 킬 마음은 들지 않았다. 유키의 일로 모두가 예민한..
마법부 문을 열고 나오며 루치아는 숨을 뱉었다. 따뜻했던 실내를 순식간에 거짓으로 만드는 차가운 공기가 두 뺨에 와 닿은 탓이었다. 급격한 온도 차를 무마하고자 폐로부터 한 번 더 숨을 끌어모았지만 크게 유의미하진 않았다. 이대로 얼마간 거리를 더 걸을 예정이었으니 냉랭한 기온에 익숙해질 대비를 하는 게 더 나을 듯싶어 그는 코트 옷깃을 당기며 걸음을 옮겼다. 내쉬는 숨이 하얗게 뭉쳐 입김이 되어 허공에 오래간 머무르는 계절이었다. 마법사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의미가 없었지만, 연말이 다가온다는 건 머글에게나 마법사에게나 똑같았다. 인구가 더 많은 머글 세계의 기념일 날짜에 맞춰 사람들은 12월이 되면 한 해의 마무리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가족 혹은 친구들과 어떤 식으로 연말을 보낼지 구상하고 다녔다. 자연..
함선은 황야를 향하고 있었고, 갑판은 그 황야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전부 끌어안고 있었다. 갑판에 선 리베리 하나는 그 황야를 전부 감당하기에는 모자라 보였다. 리베리의 탓은 아니었다. 세상을 떠안을 수 있는 개인이 있다면 켈시는 카르멘과 대지에 관한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일개 오퍼레이터인 리베리는 그들이 우물가에서 나눈 대화를 알지 못했지만, 스스로 이미 그러한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는 듯했다. 실제로 그의 눈에는 황야가 낯설지 않았다. 엘리시움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지면과 수평선을 이미 등진 적이 있었다. 한 인간이 세상의 무게에 짓눌리는 일로부터 밀려나고 회피하기를 택한 이상, 다시금 비슷한 광경에 압도되기란 어려울 터였다. 감당할 수도 없는 세상의 무게보다 온 몸의 혈관을 타고 도..